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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 세종의 외교와 군사 정책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4-17 조회수 : 4030



조선시대 국제질서와 외교체계 
조선이 직면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현대 한국이 접하는 국제사회의 성격이나 내용과 차이점이 많다. 전대미문의 세 계 제국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한 몽골제국을 중원에서 몰아내고 강력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등장한 명나 라가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중심국가로 존재하던 시대였다. 몽골을 몰아낸 홍무제(洪武帝)는 전통적인 중화주의(中華主 義)를 바탕으로 명 중심의 국제질서를 형성하고, 조선을 비 롯한 주변국에 엄격한 조공제도에 입각한 국가관계를 강요 했다. 국제질서에서 중심 국가였던 명의 황제는 하늘을 대리 한다는 의미에서 천자(天子)라고 지칭하고, 주변국에 대해 상하서열을 강조하는 형식의 국제관계를 압박했다. 이러한 국제질서를 큰 국가(천자의 나라)와 작은 국가(제후의 나라) 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계서적(階序的)’이라 표현할 수 있 다. 한국사에서 조선이 역사발전을 거듭하던 시기에 동아시 아 국제질서는 계서적 성격의 불평등한 관계였으며, 그 중심 에 있는 국가에 따라 ‘명(明) 중심 국제질서’ 또는 ‘청(淸) 중 심 국제질서’라 할 것이다. 

조선시대든 현대사회든 외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명분이다. 다만 조선시대 국제질서는 예의(禮儀)라는 명분이 보다 설득력 있게 작용하는 시대였으며, 예의의 근본 속성 이 계서적이었기 때문에 강대국은 천자국을 천명하고 주변 국가는 제후국을 인정한 것이다. 예의에 기반하여 설정된 조선시대의 국제질서에서 천자국과 제후국은 천자국과 제 후국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와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 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임진전쟁 발발과 명군의 참전, 문 화가 번성한 세종시대의 야인정벌 등이 있다.


명 중심 국제질서에서 세종의 외교·군사적 선택 
세종의 시대(1418~1450)는 조선의 변혁기였다. 국왕으로 서 세종은 국내 문제를 ‘위민(爲民)’ 정신에 입각해 해결하 고, 국제정세에서 발생하는 대외적 위협을 외교와 군사측 면에서 효율적으로 대응했다. 우선 즉위 초기에 행한 대마 도 정벌은 여말선초 최대 위협요소였던 왜구 문제를 해결 한 군사정책이었다. 그러나 툭하면 침입을 일삼는 북방의 여진족은 그들의 특수한 정치·외교적 위치 때문에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원·명 교체기에 한반도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 는 격동기를 경험했다. 

원·명 교체는 북방민족인 몽골의 다스림에서 한족의 다스림으로 전환됐기 때문에 정치·사 회·문화·경제 등에 큰 변화가 있었다. 명나라의 창업군 주 홍무제는 사회적으로 몽골의 풍습을 일소하고 정치·행 정적으로 황제 중심의 정치체제를 갖추기 위해 승상제(丞 相制)를 폐지하고 육부를 중심으로 중앙과 지방을 일원적 으로 통치했다. 군사적으로 군령권과 군정권을 분리해 통 수권을 황제에게 집중시켰으며, 각종 예제와 법제를 제정 해 황제의 권위를 높였다. 

고려 말 사회혼란과 민심이반을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건국된 조선은 역성혁명의 정통성 결여를 명 중심 국제질 서에서 확보하고자 했다. 내부적으로 구 고려세력을 견제 해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고, 유학을 진흥시켜 불교의 폐 단을 일소하며, 사병을 혁파해 군사력을 관군으로 유입시 켜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건국 초기 산재한 정치·경 제·사회 현안을 개혁하기도 힘겨운 시기에 

명나라는 원나 라의 이전 영토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자 요동으로 진출했 다. 요동과 이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족 문제는 조선과 명나 라 사이에 첨예한 외교사안이 됐다. 명나라는 요동에 진출하면서 북쪽 몽골세력에 대응하 기 위해 여진족을 적극적으로 회유했으며, 여진족장에게 명예직이지만 관직까지 내렸다. 명은 군사조직으로 변경에 위소(衛所)를 설치하고, 최고 조직으로 도지휘사사(都指揮 使司 : 줄여서 都司)를 설치했다. 요동에 설치된 도사를 요 동도사라고 하며, 이 지역을 군사조직이 통치하는 군정(軍 政) 지역으로 운영했다. 귀화하는 여진족에게 요동도사의 외곽 군사조직으로 건주위·건주좌위·건주우위 등을 설 치하고 벼슬을 줬다. 결국 조선의 북방을 침입하는 여진족 은 명 중심 국제질서에서 명의 관직을 가진 추장이 지휘하 는 무리였다. 따라서 야인 정벌과 같은 조선의 군사적 행동 은 명나라와 일정하게 조율돼야 하는 군사·외교 문제였다. 세종은 국제정세와 국토수호를 긴밀하게 분석하고 실 천한 군주였다. 명나라에 적극적으로 여진족의 문제점을 전달하고, 황제국가로서 명나라의 과감한 결단을 촉구하는 한편 북방의 군사조직을 재편하고, 군사지휘관을 파견해 군사정보를 수집·분석했다. 명나라의 협조를 얻은 뒤 두 만강 방면으로 김종서(金宗瑞)를 파견해 육진을 개척하고, 압록강 중상류 지역으로 최윤덕(崔潤德)을 파견해 사군을 설치함으로써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는 국토회복 을 달성했다. 1433년(세종 15)과 1437년(세종 19) 두 차례 에 걸쳐 벌어진 대규모의 ‘파저강 야인 정벌’ 전쟁은 세종 의 적극적인 영토인식과 군사의지를 잘 보여준다. 

실질적으로 이 시기 조선의 군사력은 기병 중심의 여 진족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세종은 지속적인 군사 훈련과 화기 제조·개발, 성진(城鎭) 수축, 병선 개량, 병서 간행 등의 국방정책을 시행해 국토수호의 큰 업적을 달성 한 것이다. 특히 세종은 ‘진법서(陣法書)’의 편찬과 시행을 강조했다. 전투를 위해 인원과 장비, 군사시설 등을 지형· 지물이나 전장 상황에 맞게 구축한 진(陣)을 세우는 방법 과 운영법을 의미하는 진법(陣法)은 조선시대 최대 군사문 제였다. 지금의 전술에 해당되는 개념이 진법이며, 작전계 획도에 해당되는 것이 진도(陣圖)였다. 세종은 친히 진법 서의 편찬에 참여하고,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진법훈련을 통한 실천적 군사훈련이 필수적이라 인식하고 이를 실천 한 군주였다. 즉위 초기의 대마도 정벌과 중후기의 여진 정 벌은 건국 초기 혼란스러웠던 조선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제도정비와 문물융성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자칫 명나라와의 불화로 이어질 수 있던 대외정벌을 외교 적으로 슬기롭게 해결하고, 일본과 여진에 대해 조선의 강 력한 군사의지를 보여줌으로써 문화와 군사대국으로서 조 선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준비와 훈련으로 조선을 강대국으로 변화시킨 군주, 세종 
군사행동뿐만 아니라 세종은 천명(天命)을 대리하는 군주 로서 왕위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천문 관련 기술과 서적 편찬에 관심을 가졌으며,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칠 정산외편(七政算外篇)』,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과 같은 역법서(曆法書)를 편찬하고, 인쇄기술의 발전을 이뤘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군사기술의 발달로 연 결되는데, 세종은 화약과 화기(火器)의 제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시켰다. 당시 화약과 화 기는 명나라가 가장 발전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무기체계 에 관련한 기술의 유출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에 세종은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탈피해 독자적인 화포(火砲)의 개량 과 발명을 추구했다. 그 결과 조선의 군사무기 가운데 완구 (碗口)가 개량되고, 소화포(小火砲), 철제탄환, 화포전(火 砲箭), 화초(火鞘) 등이 발명됐다. 무기체계의 안정적인 성 능개량과 개발을 위해 세종은 화포주조소(火砲鑄造所)를 설립하고, 화포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그리고 규격을 그 림으로 표시한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간행했다.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대를 언급할 때, 많은 이들 이 세종 대를 떠올린다. 군주에게 요구되는 수신(修身)의 노력을 유년 시절부터 꾸준히 경주했으며, 군주가 된 이후 백성들에게 군주가 담당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게 국가정책 으로 실천한 군주가 세종이다. 세종은 국제질서와 군사활 동을 조화시켜 국가안보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군주이기도 하다. 무기체계를 체계적으로 개선·발전시켰으며, 군사훈 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진법서’를 편찬·보급 해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강화된 군사력으로 조선을 위협 하던 왜구와 여진족에 대해 과감한 정벌활동을 전개한 군 주다. 깊은 학문적 성취를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서 조화와 소통을 강조하고, 국제질서의 중심국가 명나라와 우호관계 를 유지하며, 훈련과 준비된 군사력으로 유연하며 과감한 군사작전을 지휘한 군주. 그가 세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