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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곡성의 돌실나이 김점순
발행일 : 2021-01-06 조회수 : 4206
곡성의 돌실나이 김점순

1918. 8. 2. ~ 2008. 2. 5. | 보유자 인정: 1970년 7월 22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곡성의 돌실나이 김점순

국가무형유산 곡성의 돌실나이
Master Artisan of Gokseong Hemp Weaving

“(…) 손톱이 길게 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살이 허옇게 드러났다/ 누런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치마를 펼쳐 들고 물끄러미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내가 입은 두꺼운 삼베로 된 긴 치마/ 위로 코피가 쏟아졌다/ 입술이 부풀어 올랐다/ 피로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독약인 것을/ 꿈속에서조차 넘 늦게 알 된 것일까 (…)”

- 조용미 詩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중에서

한민족과 함께 시작한 옷감 삼베

‘돌실나이’의 ‘돌실’은 전남 곡성군 석곡(石谷)면의 옛 이름이고, ‘나이’는 ‘베를 짜다’의 옛 표현인 ‘베를 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석곡에서는 예부터 전통적으로 세포(細布)의 삼베를 생산하였는데, 삼베하면 돌실나이라고 말 할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것이 명사화되어 생긴 이름이다.

삼베는 마포(麻布)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삼베 역사는 매우 깊다. 우리나라 인피섬유(靭皮纖維: 줄기 형성층의 바깥쪽 조직에 함유되어 있는 섬유. 체관부 섬유, 피층 섬유 따위로 이루어졌으며, 대부분 실용적으로 쓴다. 이것이 잘 발달된 대마, 아마로는 실과 베를 만들고 닥나무, 삼지닥나무로는 종이를 만든다)직물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이미 사용되어 왔고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예맥전(濊貊傳)]에도 마포의 생산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한시대에도 종마(種痲)가 있었다고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의 험한 산중에서 마포가 산출된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보편적으로 삼국이 다 마포를 생산하였으며, 특히 고구려의 산간지방에서 많이 산출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세마포의 직조기술이 더 발달되어 중국으로 수출되었으며, 이때 마포 역시 문물교환의 수단으로 모시와 함께 사용되고 있었다.

스무 살 때 시집 온 뒤 삼베 짜는 일에 평생을 바쳐 온 김점순 선생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재래식 베짜기는 곡성에서 전해오고 있다. 곡성 삼베는 공이 많이 드는 세포이며, 곱기가 또한 모시같이 청결하여 다른 길쌈보다 더 공이 많이 든다. 이곳 아낙네들은 그들의 정성을 바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왔다. 그 뛰어난 솜씨를 인정받아 일찍이 나라님의 진상품이 되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이 곳은 섬진강과 보성강이 삼면으로 흐르는 물 맑은 지방으로서 외부와는 번잡한 접촉이 없어 예로부터 가내공업으로 전해오는 베짜기를 지속하고 있다. 이 곡성 돌실나이의 특성은 지금도 예와 같은 세포로 질이 변함이 없다. 포의 폭 역시 옛날 그대로 35cm이며 한 필의 길이도 40자의 옛 규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돌실나이 전통을 재래적으로, 기술적으로 가장 잘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 故 김점순 선생이었다. 김점순 선생은 스무 살 때 시집 온 뒤 초막 같은 집에서 오직 삼베 짜는 일로 평생을 살았다. 그 일로 남편과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두 아들과 딸을 교육시키며 지내 온 억척스런 ‘한국의 어머니’였다. 친정어머니가 “아야, 돈 되는 굵은 베여야 돼”라고 하며 열심히 농포를 만들라고 했지만, “엄니 난 한 필을 팔아도 목 돈 되는 것을 만들라요”라고 하며 고급삼베만 고집스럽게 짰다. 그 고집스러움이 돌실나이의 명맥을 이어가는 마지막 솜씨가 되어 국가무형유산 보유자(1970년 지정)로 인정되었다. 김점순 선생은 농포(4~5새로 농부들이 입는 옷감이나 장례식 대 사용하는 상포용), 중포(6~7새로 보토 선비들이 입던 모시적삼이나 두루마기용), 세포(9~12새로 제일 고급 베로 임금이나 고위관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의 옷감) 짜기에 두루 능했다. 그 중에서도 한 올 한 올 정성을 다하여 짜야하는 세포 짜기에는 그 솜씨를 따를 자가 없었다. 물론 김 선생은 삼베 외에도 목화에서 베를 짜는 무명이나 누에고치 실을 뽑아내는 명주 베 등 안 짜본 것이 없었다. 김점순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돌실나이 명맥은 전승교육사인 양남숙 선생이 이어 왔으나 양남숙 선생도 고령으로 인해 2020년 국가무형유산 명예보유자로 인정받은 후 그 명맥을 잇기가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곡성의 돌실나이는 2019년 12월 31일, 경북무형문화재 안동포짜기와 통합, 국가무형유산 삼베짜기로 지정되었다.

작품

하단 내용 참조
삼베(Hemp Cloth,37cm)

한해살이 풀인 대마의 껍질을 벗겨서 짠 옷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국가 시대부터 사용하여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삼베를 만드는 핵심기술은 대마 껍질을 벗기고 갈라 쪼갠 다음 일정한 굵기로 잇는데, 물레를 돌리거나 실을 날고 베틀에 얹어 짜는 것은 일반적인 베짜기와 마찬가지이다. 삼베는 다른 옷감보다 올이 굵어 숭숭 뚫리기 때문에 바람이 잘 통한다. 김점순 선생이 짠 삼베 또한 그러하다. 길고 무더워 땀이 차는 여름철 옷감으로 삼베만한 것이 없다. 삼베의 색은 누렇고 거친 느낌이 나기 때문인지 요즘에는 수의를 비롯하여 상복을 짓는데 널리 애용되고 있다. 하지만 장례마저 검은 양복을 입고 치러 삼베로 짠 옷을 보기가 쉽지 않다.

작업도구

삼베의 원료는 1년생 삼풀(대마: 大魔)이다. 3월 하순에 파종하여 소서가 지나 2~2.5m로 자라면 벤다. 베어온 삼풀은 ‘삼칼’로 가지에서 잎을 훑어 낸 다음, 삼단을 큰 솥에 어긋나게 넣고 한 시간쯤 쪄 삼굿을 만든다. 솥에서 꺼낸 삼굿은 즉시 껍질을 벗기는데, 벗긴 삼을 흐르는 물에 담가 대를 뺀 다음 한 묶음씩 만들어 말린다. 한 묶음씩 열 묶음을 ‘한 곰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한 곰뱅이’는 100묶음인 것이다.

하루 동안 쪼갤 수 있는 양만큼의 삼을 물에 적셔 짜서 마루나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삼을 째는데, 왼손 엄지에 삼을 쥐고 손톱 끝으로 쭉 밀어 쪼개는데 단단한 것은 무릎 위에 걸치며 홅는다. 한 묶음의 삼을 다 째면 외손으로 삼머리를 쥐고 도마 위에 올려 삼톱으로 홅는다. 쪼개진 삼은 쩐지다리에 걸어놓고 손바닥에 침칠을 해서 하며 삼대가리와 끝을 허벅지에 대고 비벼서 소쿠리에 담으면 삼실이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삼실은 물에 적셔 물레로 짓는다. 이제 다시 돌굿에 올린 실것을 물에 적셔 짚재에 버무려 따뜻한 방에서 일주일 동안 재운다. 일주일이 지나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실것의 재를 털고 큰 솥에서 푹 삶은 후 냇물에서 방망이로 두들긴 다음 2~3일간 햇볕에 말리면 하얗게 표백된다.

완전히 말랐으면 돌굿에 올려서 다시 내린다. 내린 실것은 고르게 만든 다음 소쿠리나 체에서 하나의 삼올 덩어리가 되어 꾸리에 열십자로 매어 감아둔다. 이것을 ‘실떡’이라고 한다. 실떡 한 뭉치는 꾸리 세 개쯤 만들며, 실떡 3근이며 40자 삼베 한 필을 짤 수 있다. 삼베를 짜는 과정은 날실을 날고(整經), 풀을 발라 베 메기를 하며(加湖), 베틀에 올려 짜며 명주베 모시베 무명베와 마찬가지다.

김점순선생님의 작업도구

약력

  • 1920년 8월출생
  • 1970년국가무형유산 곡성의 돌실나이 기능보유자 인정
  • 1975년제7회 남도문화제 삼베짜기 시연
  • 1988년서울올림픽 기념축제 시연
  • 1988년한국민속 공예전
  • 1991년농협30주년 기념 축제 시연
  • 1970년~2003년보유자 작품전 출품
  • 2008년2월노환으로 별세
  • 글 이치헌 / (국가유산진흥원 전승지원실장)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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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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