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연구

문화유산이야기

갓일 박창영
발행일 : 2020-12-29 조회수 : 5289
갓일 박창영

1943. 9. 10. ~ | 보유자 인정: 2000년 7월 22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갓일 박창영

국가무형문화재 갓일
Master Artisan of Horsehair Hat Making

부인을 맞아들인 자는 상투를 틀고 갓을 쓴다. 또 처가 없는 자는 30, 40세에 이르기까지 갓을 쓰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뒷머리에 땋아서 등에 늘어뜨린다.

갓을 쓰는 자를 부르는데 모 서방이라고 한다. 갓을 쓰지 않은 자를 아이라고 말하고, 모 도령이라고 부른다.

또 그 이름을 부른다. 가령 연장자이지만 항상 갓을 쓴 소년에게 막 불리고 모든 일에서 권력이 없다.

- 조선잡기 (혼마 규스케 저, 최혜주 역, 김영사 2008년 발행) 중에서

선비의 인격이자 한국적 아름다움의 상징 갓

속칭 갓으로 불려지는 흑립(黑笠)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백의(白衣)와 대비되어 조선시대 선비들의 신분을 상징하고 있다. 갓은 고려 시대에 서민들이 즐겨 쓰던 패랭이(平凉子)에서 유래되어 조선시대에는 한층 양식미를 갖춘 공예품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흑립은 의관의 정제를 중시했던 조선조 선비들이 평상시에 항상 애용하였고 그들의 취향에 따라 갓의 대우가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하였으며, 양태도 넓어지고 좁아지는 등 시대의 흐름 속에 양식적인 변천을 거듭하였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 나오는 갓보다는 혜원 신윤복이 그린 갓이 훨씬 풍채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그들 화가가 가진 필선에 차이도 있겠지만 시대차에 의한 유행의 반영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갓이라는 말은 본시 순수한 한국어이다. 갓을 한자로 입(笠), 흑립(黑笠), 칠립(漆笠)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보통인데 검게 칠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흑립이요, 옻칠을 하여 견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칠립이다. 그러나 이러한 흑립과 칠립의 형태가 언제부터 굳혀진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근래의 갓은 총대우와 양태에다 성근 명주를 덧씌워 옻칠한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바람이 세찬 해안 주민에 있어서는 총대우에 깁싸개를 하지 않는 음양립을 즐겨 썼다. 갓은 조선시대 말까지 매우 유행하여 성인 남자는 모두 쓰고 다녔으나 한말 개혁 정책으로 단발령이 내려 상투를 베고, 옷에 검은 물감을 뿌려 갓의 사용이 갑자기 저하되고 지금은 사극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엽까지만 해도 전국 어느 곳에서나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해방 후까지 활발하게 제작이 성행했던 곳은 통영, 예천, 대구, 김천, 김제, 남원 등지이다.

갓 속에 담긴 조상의 숨결을 4대째 이어온 박창영 선생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청복동 816번지에서 태어난 박창영 선생의 집안은 4대째 갓을 만들고 있다.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예천 돌티마을은 선생이 어렸을 적만 해도 80가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갓을 만들던 전통적인 갓마을이었다. 증조부 박항길 선생때부터 시작하여 조부 박형석 선생이 대를 이어 받았고 백부 박주해 선생과 중부 박월해 선생, 그리고 부친 박경해 선생이 모두 갓을 만들었다. 모두 갓방을 경영하며 총모자와 양태 및 갓을 만들어 예천갓의 중심을 이루었다. 외할아버지 김영일 선생도 예천에서 대규모 갓방을 경영하여 그곳에서는 부친의 친구인 안수봉 선생을 비롯하여 친구들과 함게 제작하는 등 박씨 일가는 예천 갓을 대표할 만큼 번창하였다.

예천 갓일 가계도<예천 갓일 가계도>

이렇듯 집안 전체가 갓일에 종사하는 환경에서 자란 박창영 선생은 중학교를 졸업한 16세 때에 큰 형님 박호영 선생의 권유로 아버지 밑에서 갓일을 전수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갓일을 배우는 도중 아버지가 작고하여 아버지의 친구인 안수봉 선생의 갓공방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게 된다. 갓일 시작할 때에는 모자골에다 총모자를 박아 놓고 바닥을 고르는 골배기나 수장일부터 입문을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18세가 되던 해에 안수봉 선생의 갓방을 나와서 대구의 규모가 큰 갓방으로 옮겨 다시 수장일부터 배우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미 갓이 귀했기 때문에 갓을 만들면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수장일 또한 웬만한 대기업에 근무하는 회사원의 월급보다 수입이 좋았다. 1967년 4월에 고향인 예천 청복동 돌태마을로 귀향하여 갓공방을 차렸다. 당시 청복동에는 갓방을 운영하는 집이 여럿이었는데, 새 갓을 만들거나 헌 갓을 수집하여 수리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로 예천은 전국에서 모여드는 갓 상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차츰 갓의 수요가 격감하였다. 생활에 어려움을 느껴 1978년 서울로 이사한 후 계속 갓일을 하였으나 역시 판로는 없었다. 이에 선생이 생각해 낸 묘안이 바로 방송국에 갓을 납품하는 일이었다. TV 드라마나 영화 속 사극의 인물들이 갓을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영화 ‘스캔들’에서 주인공 배용준이 쓰고 나온 갓과 KBS 드라마 ‘거상 김만덕’과 ‘태양인 이제마’, ‘명성황후’, ‘장희빈’ 등 사극에 등장하는 갓은 모두 선생의 작품들이다.

“무작정 방송국 국장님을 찾아가 ‘내가 만든 갓을 써달라’고 했지요. 품질엔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TV사극이나 영화에 나오는 갓은 거의 제 손으로 만든 거라고 보면 됩니다.”

선생에게 갓일은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만은 아니다.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4대를 이어 130여 년 동안 이어진 가업을 통해 선생이 터득한 삶의 자세다. 그로 인해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갓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일에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철종어진’에 나오는 갓인 전립(氈笠)을 비롯해 사대부들이 주로 썼던 박쥐모양 갓과 국상 때 주로 썼던 백립(白笠), 사신들이 썼던 옥로립(玉鷺笠) 등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이런 갓 하나를 재현하는 데는 1년여가 걸린다고 한다. 작품을 만드는 일을 온전히 선생 혼자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유물을 찾아 다니며 예전의 갓을 세심히 관찰하는 일부터 머리카락만큼이나 얇은 대나무인 세죽사(細竹絲)를 하나하나 엮어 모자 부분을 만들고 이어 양태를 엮고 세죽사 가닥마다 명주실을 하나하나 붙이는 작업, 먹칠과 옻칠, 모자와 양태를 모아 곡선을 이루도록 모양을 잡는 일까지. 까다롭고 섬세한 공정을 모두 익히려면 짧게 잡아도 10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작업과정에서 화로에 담긴 숯으로 인두질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인내심도 필요하다.

선생은 1985년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이사장상을 시작으로 1988년 문화재관리국장상, 1989년 문예진흥원장상을 수상했으며, 1986년 일본 규슈 종합전시장에서의 7일간 갓 제작 시연, 1988년과 1989년에는 미국 LA에서 특별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2000년 국가지정 국가무형문화재 갓일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현재 선생의 장남이 박형박씨가 가업을 이어 5대째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박형박씨는 전통의상학 전공으로 박사과정까지 이수하여 이론적인 체계를 정리함과 동시에 제35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출품작인 ‘흑립’으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등 기능적인 실력까지를 겸비하였다. 미술을 전공하고 현재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는 둘째 아들 역시 틈틈이 갓일을 배우고 있다.

“ 과거 선조들이 만든 갓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지요. 이제 갓을 찾는 이들은 없지만,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갓일은 제가 평생 놓을 수 없습니다. ”

작품

박쥐문양갓 _ 66×19.5cm

명주로 복을 상징하는 박쥐문양을 떠서 양태에 붙였으며 모정(帽頂)에는 선비의 청백리 상징인 옥으로 장식했다.

박쥐문양갓 _ 66×19.5cm_01
박쥐문양갓 _ 66×19.5cm_02
박쥐문양갓 _ 66×19.5cm
황창술갓 _ 50×15cm (끈 90cm)

조선 중기 인물이었던 단구 황창술이 쓰던 갓을 복원하였다. 죽사로 한 올 한 올 엮어 섬세하게 제작하였다.

황창술갓 _ 50×15cm (끈 90cm)_01
황창술갓 _ 50×15cm (끈 90cm)_02
황창술갓 _ 50×15cm (끈 90cm)_03
황창술갓 _ 50×15cm (끈 90cm)
백립 _ 50x20cm(끈79cm)

주로 국상때 착용하였던 갓으로 삼년상을 치르고 담제(3년상을 치른 후 두 달이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에 이르는 기간에 사대부가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백립_50x20cm (끈79cm)_01
백립_50x20cm (끈79cm)_02
백립_50x20cm (끈79cm)_03
백립_50x20cm (끈79cm)

제작과정

먼저 머리카락보다 가는 말총을 작은 쇠갈고리처럼 생긴 바늘로 정교하게 엮은 뒤 먹칠을 해 총모자를 완성한다. 차양 부분인 양태는 대나무를 삶아 쪼개고, 문질러 머리카락굵기로 만들어 결은 뒤 다시 명주실이나 대올을 덧입혀 옻칠을 한다. 완성된 총모자와 양태는 인두질과 아교칠, 먹칠, 옻칠을 반복하면서 조립해 완성한다. 갓을 만드는 데는 가느다란 대나무로 갓의 테를 만드는 ‘양태일, 말총으로 총모자를 만드는 ’총모자일‘, 양태와 총모자를 맞추어 갓을 완성시키는 ’입자일‘ 등 크게 3가지 공정을 거치게 되는데 양태일 24과정, 총모자일 17과정, 입자일 10과정 등 총 51개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한 개의 갓이 완성된다. 그만큼 정성을 들여야 완성되는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1.대밀기

1. 대밀기

2.골빼기

2. 골빼기

3.트집잡기 위해 인두잡기

3. 트집잡기 위해 인두잡기

4.트집잡기

4. 트집잡기

작업중인 박창영 선생

작업중인 박창영 선생

약력

  • 1943년출생
  • 1973년~1989년전승공예대전 입선, 장려상, 특별상
  • 1980년국립민속박물관 백립기증
  • 1998년일본 규슈 한일종합전시회 초청 작품제작 시연
  • 2000년국가무형문화재 갓일 기능보유자 인정
  • 2000년~현재국가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 2004년미국 뉴욕 맨하탄 한국문화박물관 갓 기증
  • 2004년세계박물관대회 ‘박물관과 무형문화재’ 갓 제작 시연
  • 2005년~2008년남북전통공예교류전 참가
  • 2007년보물 494호 갓 원형 복원
  • 2007년~2010년부천세계무형문화유산엑스포 참가
  • 글 이치헌 (한국문화재재단 한국무형문화재진흥센터센터장 /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저자)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옥립_42x20cm(1).jpg

옥립_42x20cm(1)

옥립_42x20cm(2).jpg

옥립_42x20cm(2)

옥립_42x20cm(3).jpg

옥립_42x20cm(3)

옥립_42x20cm(4).jpg

옥립_42x20cm(4)

19세기 초 갓_61x19cm(1).jpg

19세기 초 갓_61x19cm(1)

19세기 초 갓_61x19cm(2).jpg

19세기 초 갓_61x19cm(2)

백립_51x18cm.jpg

백립_51x18cm

박쥐문양갓_64x20cm.jpg

박쥐문양갓_64x20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