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오디오북

가야금 산조 ‘이영희’ 편 (2) - 가르치고 배우며 김윤덕류를 잇다
작성일 : 2022-12-06 조회수 : 850
(이영희 ‘가야금 산조’ 中)
이영희 육성 // “그분들한테 휩싸여서 살다 보니까, 몸으로 그냥 오더라고요. 성음이. 예술학교 선생 한 게 제 일생에 굉장한 도움을 만들어 준 거예요. 호흡하다 보니까, 생활을 같이하다 보니까, 그 어른들이 정말 저를 귀여워하셨어요. 그 어른들이 그렇게 저하고 같이 여행하는 거를 즐기셨어요. 그러다 보니까 생활에 젖어버린 거예요. 그 어른들의 그 모든 영향이. 그래서 저는 행운아죠. 그 어른들하고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가 없는 거예요.”


나레이션 // 다큐드라마 문화가 된 사람들.
가야금 산조, ‘이 영 희’.
제2화, 가르치고 배우며 김윤덕류를 잇다

나레이션 // 이 프로그램은 국립무형유산원에서
구술 채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EBS가 오디오 자서전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대학 시절, 김윤덕에게 정남희제 가야금 산조를 배우다>
#1. 1958년, 운현궁 행랑채

(‘가야금 산조’ 자진모리)

김윤덕 // 영희야, 자진모리를 끝으로 가야금 산조 가락은 마무리하자.
청년영희 // 네, 선생님. 그런데 질문이 있는데요,
스승이신 정남희 선생님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김윤덕 // 처음엔 레코드판 듣고서 흉내 내려고 했는디. 그런데 쉽지가 않어.
성순종 소개로 정남희 선생님을 만나가지고 가야금 산조를 익혔는디
1.4 후퇴 때 북으로 가시면서
강태홍 선생님을 만나보라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부산 가서 그분한테 또 배웠지.
영희 // 선생님도 배우시는군요.
김윤덕 // 영희 너도 계속 배우고 싶잖여. 나도 그려.
영희 // 저... 어떻게 하면 가야금을 잘할 수 있을까요??
김윤덕 // 그저 많~이 해야 돼.

20대 영희 // 사실 김윤덕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많이 해야하는 게 정답이긴 하지요.
결국 ‘스스로 터득하라’는 의미 같은데,
알쏭달쏭하기만 했습니다. 가락 외우는 걸로 끝나지,
더 파고들어 가르치진 않으셨거든요.


김윤덕 //영희야, 이제 마무리할까?
영희 // (의욕에 차서) 선생님, 저 거문고 산조도 가르쳐주세요.
김윤덕 // 그래, 거문고도 진양조부터 시작하니 내가 하는 거 들어봐라!

(김윤덕의 ‘거문고 산조’ 진양조)

이영희 육성 // “근데 저한테 악보를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악보를 안 가르쳐 주시고 당신이 악보를 만들어 놓은 거는 제가 그거를 필사해서 아이들한테 참고로, 외우기 쉽게 악보도 자꾸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저장시키느라고 악보를 보여주는 거지. 저도 악보를 안 가르쳐요. 피아노 치듯 하면 가야금이 아니죠. 악보는 피아노 치듯 하는 거지, 그 가락 속에 녹아있는 그런 선율은 표현할 수 없는 거예요. 그 선율은 스스로 터득해야 돼요.”


<신인국악경연대회에서 아쟁으로 1등하다>
#2. 1961년, 김윤덕 선생님 학원

(아쟁 연주)

원영재 // (다가오며) 이야~ 영희 너 아쟁도 배운다더니 소리 좋다!
청년영희 // 어, 원영재! 어서 와라. 나 요즘 아쟁 연습 많이 하고 있어.
원영재 // 언제부터 배웠더라?
영희 // 본격적으론 대학 3학년 2학기 때 시작했으니까 1년 반쯤 됐나.
한일섭 선생님이 여기 윤덕 선생님 학원에 오셔서
아쟁 하시는데 너무 좋더라. 그래서 시작했지.
원영재 // 잘했다. 그런데 영희야, 너 김영희, 맞지?
영희 // (살짝 성내며) 아니! 이영희야! 왜 남의 성까지 바꾸는데?
원영재 // (놀라서) 그래? 이 씨였어?
사실... 전국신인국악경연대회에 너 이름으로 신청했거든!
영희 // 뭐?
원영재 // 잠깐만 여기 있어 봐. 이름 빨리 고치고 올게!

이영희 육성 // “서울대 국악과가 만들어질 때, 장사훈 선생님이나 이혜구 선생님이 주축이 돼서 만들었잖아요? 그때 이제 황병기가 가야금으로 이제 강사 들어갔고, 원영재가 거문고로 강사 들어갔어요, 초기에. 황병기나 원영재나 다 김윤덕 선생님 제자예요.
그래서 전국 콩쿨대회에 황병기가 맨 먼저 1등을 했고, 그다음에 원영재가 또 1등을 한 거야. 그다음에 날보고 출전하라고, 출전하라 소리도 않고 1961년도 가을에 전국 국악 콩쿨대회가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신청서를 낸 거예요.”


(뛰어오는 소리)
원영재 // (헉헉 대며) 아휴, 큰일 날 뻔했다.
여기 이영희로 바꾼 접수증 받아왔어.
영희 // 니 맘대로 신청은 했다만 사실 나도 도전해보고 싶어졌어.
원영재 // 황병기가 가야금으로, 나는 거문고로 1등 했으니까
이번에 넌 아쟁으로 출전해봐. 그럼 될 거야!

(수상 / 이영희 가야금 음악)
20대 영희 // 저한텐 운이 따르나 봐요.
결국 원영재 말대로 기악부 1등을 했거든요. 아쟁으로 말이죠.
행운은 상 탄 걸로 그치지 않았어요.
취직을 하게 됐고, 제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인연이 찾아왔습니다.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가르치며, 배우며>
#3. 1962년, 국악예술학교

(교무실 문 열고 들어오는)
교장 // (교무실에서 외치는) 자, 선생님들, 주목하세요.
우리 국악예술학교에 이영희 선생이 새로 부임했습니다.
경연대회에선 아쟁으로 1등을 했고,
김윤덕 선생에게 가야금과 거문고를 사사한
우리 국악계에 떠오르는 샛별이라고 할까요?
아쟁과 가야금, 국어 과목을 가르칠 이영희 선생입니다.

(박수와 환호)
영희 // 안녕하세요? 이영희입니다.
기라성같은 선생님들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많이 어리고 미숙하니 잘 부탁드립니다.
교장 // 교장인 제가 황송할 정도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최고의 명인입니다.
자~ 한분 한분 인사 나누시죠.

(자진모리나 휘모리 등 빠른 장단)
이창배(남) // 민요하는 이창뱁니다.
박귀희(여) // 가야금 병창하는 박귀희예요.
박초월(여) // 판소리하는 박초월이오.
지영희(남) // 피리와 해금 하는 지영희외다.
성금연(여) // 가야금 하는 성금연입니다.
한영숙(여) // 무용 가르치는 한영숙이에요.
전사종(남) // 농악 하는 전사종입니다.
김소희(여) // 판소리하는 김소희예요.
박녹주(여,50대) // 반가워요. 소리하는 박녹줍니다.
교장 // 우리 국악예술학교 선생님들은 하나만 잘하는 게 아니라
두루두루 능하지요. 게다가 학생 수보다 교사 수가 많으니
반마다 선생님들이 다 들어가서 다양하게 가르칩니다.
만능 국악인을 키워내는 거지요.

이영희 육성 // “국악계를 이끄는 모든 선생님이 거기에 다 참여하셨어요. 한 뜻을 모아주신 거죠. 예술학교가 당시에 김소희 선생님, 박귀희 선생님, 또 김여란 선생님, 한영숙 선생님, 그런 분들이 주축이 돼서 돈암동에 여성동호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돈암동 학원을 운영했었어요. 60년 이전에. 그러다가 그 어른들이 우리 같이 학원에서 국악인을 배출해내면 대접을 못 받는 사회가 되니까 우리가 학교를 만들자 해서 거기 우리나라 재력가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을 해주셔서 관훈동 집을 사가지고서 교사를 만든 거예요. 그게 1960년이죠. 저는 1962년에 교직 생활에 들어갔고.”


#4. 1962년, 국악예술학교

(아이들 떠드는 소리)
영희 // 자, 자 조용들 하고... 다들 지난 주말 잘 보냈나요?
한 명씩 이야기해 볼까요?
학생1(남) // 전 집에 내려가서 부모님께 소리 들려드렸어요.
학생2(여) // 저는 가야금 연주가 부족해서 연습했어요.
학생3(남) // 저도 친구들이랑 장단 서로 쳐주면서 소리 연습했어요.
영희 // 다 연습만 했다고요?
학생들 다 같이 // 네.
김영재(남) // 그럼요. 선생님. 저희들 모두, 이거 안 하면 죽는다,
이런 생각으로 이 학교 들어왔습니다.
학생1(남) // 영재는 밤12시까지 학교서 연습하고 집에 가는 걸로 유명해요.
학생2(여) // 그럼, 선생님은 주말에 어떻게 지내셨어요?
영희 // 그 제자에 그 선생님이라고 표현을 바꿔야 하나?
그러고 보니 나도 연습만 했네요.

(이영희 연주 中)
이영희 육성 // “오전에는 국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악기를 가르치는데, 아쟁도 가르치고 가야금도 가르치고, 가야금은 성금연 선생님한테 배우면서 가르치면서 그랬죠. 방과 후에 다 끝나고 나서는 신쾌동 씨한테 거문고도 배우고 성금연 선생님의 학원에 가서는 가야금도 배우고 그렇게 하면서 그 오랜 세월을 보냈죠. 제가 그 어른들 사이에서, 용광로 같은 속에서 제가 조금 소심해서 지금 활동할 수 있었던 거는 그때 그 분위기가 저를 만들어 준 것 같아요.”


<어른들에게 끊임없이 배우다>
#5. 1960년대, 성금연 선생님 학원

(단소 음악 / 이중주 끝부분)

성금연 // 영희 선생이랑 가야금만 타다가 단소도 함께 부니 좋은데!
자네가 내 가락을 배우니 나도 좋아.
청년영희 // 저야말로 성금연 선생님께 감사하지요.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
선생님 가야금은 가락 자체가 섬세하고 아름다워요.
작곡 잘하시는 것도 닮고 싶구요.
성금연 // 가야금을 잘하려면 소리를 알아야 해!
그러니 오늘은 가야금 병창을 좀 해볼까?

(성금연의 가야금 병창 / 소년가 中)

이영희 육성 // “또 병창 가르치실 때 나는 장단 쳐드리고, 선생님이 병창 가르치시면 나도 같이 따라 배우고 그랬더니 성금연 선생님께서 제일 잘 부르시던 병창이 <소년가>였어요. “어와 청춘 소년님네 이 말씀 좀 들어보소” 하면서 입신양명 그런 거 쫙 이야기하는 거 단가, 그다음 옛날에 가곡 가사들 단가로 한 거예요, 그게 다. 그러니까 내가 배운 <적벽부>도 소동파 어른께서 지은 적벽부거든? 소동파라는 그 중국 시인이 지은 적벽부를 제가 박녹주 선생님한테 배웠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시를, 시 가사를 가야금에 얹어놓은 게 <소년가> 그런 거예요.”


#6. 1970년대 중반, 함동정월 선생님 집

(박귀희 가야금 병창)
함동정월 // 아주 좋아. 내가 박귀희 선생한테 더 가르쳐야 할 게 있나 싶어.
박귀희 // 아닙니다. 모두 함동정월 선생님 덕분입니다. 형님 덕이죠.
30대 영희 // 제가 봐도 박귀희 선생님은 가야금 병창 보유자가 되고서
더 열심이신 것 같아요.
함동정월 // 그러고 보니 1968년엔 박귀희, 성금연, 김윤덕, 이 셋이
문화재가 됐지. 내 보기엔 이영희 선생이 박귀흴 똑 닮았어.
영희 // 어머 제가요.
함동정월 // 그래. 73년부터 일주일에 닷새나 와서 배웠는데
벌써 몇 년이야. 배우는 욕심은 박귀희나 이영희나 똑같구먼.

(함동정월의 가야금 산조 中)
30대 영희 // 재산을 모두 학교에 헌납한 박귀희 선생님께는
나눔과 배움의 열정을 배웠고,
함동정월 선생님은 ‘농현’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제게 알려주셨지요.

함동정월 // (진지하고 차분히) 가야금을 할 때 왼손으로 줄을 짚고
본래의 음 외에 여러 음을 내는 수법을 ‘농현’이라 하지.
‘농현’할 때 내 팔의 무게를 넌지시 놔서,
이 줄은 바다로 생각하고 내 팔은 배 위에 얹어있는 사람으로
생각해라. 그러면 파도에 배가 움실움실 움직이지 않느냐.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라.


< 다시 배우며 결국 김윤덕류를 잇다>
#7. 1970년대, 국악예술학교

30대 영희 // 당시 전 가야금과 아쟁, 거문고를 다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게는 여러 스승이 계셨죠.
하지만 스물한 살 때 처음 만났던 그분, 가야금 산조를 가르치신
김윤덕 선생님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어졌어요.

(김윤덕의 가야금 산조 中)
이영희 육성 // “제가 50년대에 김윤덕 선생님한테 배울 때는 정남희 선생님한테 당신이 배운 그대로를 가르치셨고, 64년인가 김윤덕 선생님이 예술학교 선생으로 왔다 가잖아요. 그때 다시 배우라고 하시더라고, 윤덕 선생님이. 다시 배운 게 지금 현재 김윤덕류이고, 처음에 나를 가르쳐준 거는 정남희 선생님의 그 가락을 가르치신 거고 1.4 후퇴 때 부산에 내려가서 강태홍 선생님한테 배운 그 가락을 다시 정남희 선생님 가락에 손질해서 조금 집어넣은 거야. 그래가지고 김윤덕류를 만들어낸 거예요. 그 가락을 다시 배우라 하시더라고요. 그러고서 68년에 문화재로 지정될 때 다시 만들어진 그 가락으로 지정이 됐기 때문에 지금 제가 그걸 이어가는 거죠.”

30대 영희 // 언제나 가슴 한 켠,
짜임새 있고 웅장한 윤덕 선생님의 가야금 산조 가락이 그리웠고,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 마무리 코너 – 덧붙이는 이야기 >

(징소리)
나레이션 // ‘덧붙이는 이야기’

(이영희 ‘가야금 산조’ 중 ‘단모리’)

나레이션 // 여러분은 지금,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이영희 보유자가 연주한 가야금 산조 중 가장 빠른 장단인 ‘단모리’를 듣고 계십니다.
특히 이영희 보유자가 계승한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의 특징은 매우 빠른 마지막 장단인 ‘단모리’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장구 장단과 가야금이 박자 속에 주거니 받거니 어우러지며 리듬 변화가 작고 엇박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는 어떻게 형성되고 전승되었을까요? 전남대학교 국악학과 이용식 교수로부터 설명 들어보겠습니다.

이용식 // 김윤덕 선생 같은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 최고의 가야금 연주였던 정남희 선생한테 가야금을 배워요. 그런데 정남희 선생은 김창조 선생님의 제자였던 안기옥, 그 안기옥의 수제자가 정남희 선생이고요. 그래서 정남희 선생, 그다음에 김윤덕 선생으로 이어지는 계파가 기본적으로 가야금 산조를 맨 처음 만든 김창조로부터 쭉 이어져 오는 그런 특징을 갖는데 정남희 선생은 사실 판소리 명창이에요. 일제 강점기 때, 또 가야금도 굉장히 잘해요.
그 선생님한테 김윤덕 선생이 배우게 되는데 안타깝게 정남희 선생 같은 경우에는 해방된 이후에 월북을 하세요. 그래서 정남희 선생님 가락은 이제 잊혀졌었고 그다음에 김윤덕 선생님이 정남희 선생님한테 배운 가락에 또 김윤덕 선생님은 자기만의 가락을 입혀서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를 만드신 거죠. 그리고 그 수제자가 바로 이영희 선생님이셔서 그래서 결국 이영희 선생님이 잇고 있는 가야금 산조가 우리나라 가야금 산조의 가장 정통성을 갖는 산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레이션 // 시대를 거치며 변화하는 가야금 산조의 특징은 현재 대학 교육과정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이용식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이용식 // 국악과 학생들은 대학교 4학년 과정 중에서 1년은 반드시 산조를 공부를 해야 돼요, 누구나 다. 그래서 산조라는 음악 자체가 우리 음악에 기본이 되는 음악입니다. 그래서 그 산조를 안 배우면 지금 만들어지는 새로운 창작 음악도 연주를 할 수 없고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산조를 배워야 되고, 그리고 예술을 프러덕트 아트, 그러니까 완성된 예술. 그리고 프로세스 아트, 과정 예술을 구분을 해요. 그러니까 서양 음악 같은 경우에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악보에 한 번 작곡을 하면 그 자체로 완성이 되죠.
그런데 우리 음악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김창조부터 안기옥, 정남희, 김윤덕 내려오는 동안 완성이 안 돼요. 계속 제자들이 자기만의 독특한 가락을 넣어서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것이 우리 음악의 기본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음악을 시간의 과정에 따라서 변신을 하는 그런 예술이다, 그래서 과정 예술이라는 그런 프로세스 아트라는 얘기를 하는 거죠.


나레이션 // 다큐드라마 문화가 된 사람들,
가야금 산조, 이 영 희. 두 번째 시간.
지금까지 극본 김정인, 연출 권윤혜,
출연 홍소영, 전해리, 오민혁, 한만중, 이한솔, 류지아, 김단,
음악 윤아성, 음향효과 이용문, 기술 조성도였습니다.

나레이션 // 이 프로그램은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의 제작비 지원,
국립무형유산원의 자료 지원으로 EBS가 기획, 제작하였습니다.
요약정보

세계 각국의 해외공연을 통해 한국문화를 널리 알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평생을 애쓰며 가야금산조의 전승에 크게 이바지한 가야금 산조 보유자 이영희의 생애를 담은 오디오 다큐드라마.

* 이 프로그램은 국립무형유산원의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채록사업’에서 확보한 자료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유의사항

본 오디오북에 대한 저작권은 한국교육방송공사에 있습니다. 본 사이트에서 취득한 오디오북은 사적 이용 범위 내에서만 사용하여야 하고, 유포, 공유를 통해 발생한 제반 문제에 대한 책임은 “이용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