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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화재

[2019.04] 왕실에 바친 술
왕실에서는 진상용 어주(御酒)와 별도로, 제례용 술을 담아 특별 관리했다. 술은 오늘날의 위스키나 코냑처럼 보관 및 유통을 장담할 수 있는 안정적인 물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소 쓰는 보통 술들은 궁중의 제반 음식을 만들어 내던 사옹원(司饔院)에서 담당했는데, 국가 행사용 제주(祭酒)와 임금이 평소 마시는 어주는 특별히 내의원(內醫院) 양온서(良?署)에서 어의(御醫)들의 감독 아래 엄격하게 제조됐다. 조선 초기 양온서에서 제조한 대표적인 제주로 ‘법주(法酒)’가 꼽힌다. 법주는 술 빚는 날과 방법을 고도의 비법으로 특정해 두고 ‘법대로 빚은 술’이라 해서 얻은 이름이다. 그러다가 숙종 때 사옹원에서 일하던 참봉(參奉·종9품) 최국준이 경주로 내려가 법주를 빚어 인기를 누렸는데, 훗날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멸절된 것을 후대에 되살린 것이 오늘날 ‘경주법주(慶州法酒)’로 유명한 ‘경주 교동법주(校洞法酒)’다(국가무형문화재 제86-다호). 알코올 도수는 16~18도로, 투명한 담황색 빛깔이 은은한 청주다. 1450년 문종 때에는 대놓고 ‘진상주(進上酒)’ 라 이름 붙인 술이 탄생한다. ‘진상주’는 당시 어의 전순의(全循義)가 집필한 요리전문서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비방이 수록돼 전해지다가 지난 2013년 농업진흥청의 주도 아래 복원에 성공했다. 도수는 16~17도다.
2019년 04월 호
[2019.04] 宮 조성 원리와 실제
조선의 새로운 수도 한양은 고려시대에 상업의 중심지로서 남경이 설치된 곳으로, 이미 많은 사람이 살고 있던 좋은 터였다. 한양은 북쪽에 주산인 북악산을 두고 동쪽은 낙산, 서쪽은 인왕산이 감싸고, 남쪽은 목멱산(남산)이 있는 분지의 형태로서 고려시대 도성이었던 개경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러한 점이 태조 이성계의 결심을 굳혔다고 생각된다. 일단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명하자 신도궁궐조성도감이 구성되고 곧바로 터를 잡고 궁궐을 짓게 되는데, 만 10개월도 걸리지 않아 완성(1395년)했다. 이때의 궁궐은 내전일곽에 들어설 최소한의 거처, 조하와 같은 의례를 치를 정전, 상의원 같은 궐내 관청, 국왕을 보조하는 중추원 등의 고위 관청, 남문 역할을 하는 오문과 양쪽 끝에 망루 역할을 하던 각루 정도였다. 궁궐이 완성되자 정도전은 새로 지은 궁궐과 전각의 이름을 지어 왕에게 올렸다. 궁의 이름은 ‘경복궁’이라고 하고 왕과 왕비의 침소를 강녕전, 왕이 나랏일을 보는 곳을 사정전, 정치적 공간인 정전은 근정전이라고 했다. 정도전은 군주는 올바른 것을 근본으로 삼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면, 즉 남쪽을 바라보면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경복궁의 정문과 근정전의 좌향(건물이 앉아 있는 방향)이 남쪽을 향해 일직선이 되도록 했다.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유교적인 통치이념이 건물에 반영된 것이다.
2019년 04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