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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염색장 윤병운
발행일 : 2021-01-27 조회수 : 5288
염색장 윤병운

1921. 4. 3 ~ 2010. 8. 4 | 보유자 인정: 2001년 9월 6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염색장 윤병운

국가무형문화재 염색장
Master Artisan of Dyeing Holder

靑出於藍靑於藍 청출어람청어람

-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

전통적으로 천연 염색은 옛날 사람들이 아름다운 색을 함유하고 있는 식물의 꽃이나 열매, 잎, 뿌리, 껍질, 그리고 동물, 광물, 해조류, 암균, 버섯, 이끼류 등에서 색을 나타내는 물질을 추출하여 이용해 왔다. 예전에는 염색의 염료가 대부분 식물 염재였는데, 그 중 쪽 염료가 가장 많이 사용됐다. 일반적으로 식물성 섬유에 주로 염색되었고, 견이나 양모와 같은 동물성 섬유에도 잘 물들여져 생활 속의 염색과 전통공예로 자리 잡아 왔다.

남(藍)이라는 말은 단순한 식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남(藍)의 색소를 함유하는 초목을 총칭하는 것이며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의 문헌에서는 남(藍)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전통적으로 한글 용어로는 쪽이나 쪽물이라고 불렸다. 쪽은 인도, 이집트를 시작으로 전파되어 중국, 한국, 일본으로 건너갔다. 기원전 3세기 중국 문헌 중 순자가 저술한 권학편(勸學篇)에 ‘청출어람(靑出於藍)’[청(靑)은 남(藍)에서 나와 남(藍)보다 푸르다 ;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를 가리키는 뜻]이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쪽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 우리나라 염직의 기록으로는 [후한서] 권85 [동이열전]에 화려한 무늬 비단과 자수 놓은 의복을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한다는 뜻으로 색깔실을 사용한다는 기록이 있어 염색 기술이 상고시대부터 벌써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백제 고이왕 때 복색 착용 제도를 정비하고 신라 때에는 염관에 11인의 염장(染匠)을 두었고 홍전, 능색전, 소방전 등의 염색에 관련된 부서가 있었다.

고려에 와서는 염색을 관장하기 위해 직염국(織染局)에 도염서(都染署)를 두어 전문 장인인 염료공과 염색공을 두어 염색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경공장에 청염장, 홍염장, 황단장 등 염색을 분업화시켜 염색을 색깔별로 관장하면서 염색 기술이 고도화되어 갔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민간 수공업으로 전환되어 민가의 부업이나 가내의 생필 목적으로 자급자족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반가 이상의 서민층에서도 염색의 욕구가 고조되어 혼수품으로 의류 및 이불, 생활용품, 보자기 등 다양한 전통염색이 가내의 비법으로 발달되어 왔다. 그러나 1856년 합성염료의 출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잠시 단절되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계승, 재현되어 환경오염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오늘날 일반대중들 사이에 가장 선호하는 전통공예로 부각되고 있는 분야이다.

쪽염색은 옛날 처녀들이 시집갈 때 쪽물들인 이불을 해가는 게 소원이었을 정도로 부자들이 소장할 있는 고급품이었으며, 쪽의 특성상 벌레의 접근을 막는다 하여 미술품을 배접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전통 쪽염색의 온전한 전승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故 윤병운 선생

국가무형문화재 염색장 기능보유자인 윤병운 선생은 1921년 전남 나주시 문평면 명하마을에서 쪽염을 생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13세부터 쪽염을 시작하여 한평생 쪽염색을 해왔다. 증조부(윤치문)-조부(윤태홍)-부친(윤주식)에 이어 전통염색을 가업으로 이어왔다.

선생이 태어난 명하마을은 영산강의 지류인 고막천가에 자리잡은 곳으로 과거에는 1여호가 염색을 하였으나 이후 윤병운 선생 집안만이 전통염색법으로 쪽염색을 이어왔다. 선생은 쪽에 대한 이론을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평생 쪽염색을 해오면서 명인의 경지에 올랐다. 1년 내내 쪽물들인 내의를 입고 손톱밑은 푸르다 못해 검게 변하였다.

선생은 1934년부터 1950년까지 전통식물염색을 생업으로 해오다 한국전쟁과 이후 혼란기에 잠시 일을 쉬었다가 1974년 다시 쪽 재배를 시작하였다. 쪽씨를 보관했다가 다시 할 수 있을 때 발아시키면 되지 않을까 생각되겠지만, 쪽씨는 일 년만 지나도 발아율이 현저하게 떨어져 쪽 농사를 계속 유지하지 않으면 염색도 불가능해진다. 더불어 1950년대 이후 화학섬유가 국내로 유입되면서 천연염색이 설 자리가 좁아졌다.

그러다가 조일순 여사가 일본에서 쪽씨를 가지고 와서 이곳저곳 다니면서 발아시키고자 노력했는데, 모두 성공하지 못하다가 윤병운 선생이 마침내 성공시키게 된다. 종자를 늘리는 작업부터 채취, 그리고 발효까지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다. 전승이 완전히 끊겼음에도 가능했던 이유는 쪽염색 기술을 잠깐 동안 한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온전히 몸으로 배워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윤병운 선생이 쪽염색을 성공시키자, 그때부터 다시 천연염색을 향한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이 이어졌다. 이후 선생의 전통 쪽염색에 대한 관심이 쏟아져 1990년대에는 방송 및 신문사 등에서 선생의 쪽염색에 대한 소개가 앞다퉈 다뤄지기 시작했다. 1994년 전승공예대전에 모시한복 2점을 출품하여 입선하기도 했으며, 1995년에는 산업인력관리공단 기능전승자로 선정되었고 1997년에는 자랑스런 전남인으로 선정되어 전남도지사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2001년 국가지정 국가무형문화재 염색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전통 쪽염색의 온전한 전승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했던 故 윤병운 선생은 2010년 8월 향년 90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4대째 이어온 가업은 선생의 아들인 윤대중(염색장 전수교육조교)선생으로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쪽염색을 이용한 다양한 상품들도 개발하고 있다.

작품

쪽염색(비단천) / 40×1800cm

실크천은 동물성 섬유이고 쪽물염색은 동물성 섬유에는 견뢰도가 떨어지는 편이므로 30번의 염색을 한 상태이다. 그 후로 잿물 제거를 위해 15번 미지근한 물에 담궈 건조했다.

쪽염색(비단천) / 40×1800cm_01
쪽염색(비단천) / 40×1800cm_상세
쪽염색(비단천) / 40×1800cm_상세(2)

제작과정

옷감에 쪽빛을 물들이기 위해서는 발효된 쪽물에 천연원단을 물들여서 산화, 발색하는 과정을 10~15회 반복한다. 염색 횟수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그 빛깔도 천차만별이다. 대략적인 염색과정을 살펴보면, 석회만들기 - 항아리담기 - 석회 넣고 당그레질 - 쪽염료 분리 - 양잿물 만들기 - 쪽염료 배합 - 6일후 염색 시작(10회 정도 반복) - 맑은 물에서 잿물빼기 - 완성품만들기 순으로 진행된다. 사용되는 도구와 재료로는 채, 고무래, 널베기, 받침대, 시루, 독항아리, 굴껍질, 무명베, 양잿물, 쪽염료 등이 있다. 쪽은 물들이는 횟수에 따라 연한 옥색에서부터 진한 감색까지 색이 다양하다. 그중 보라색이 약간 섞인 남색을 가장 아름다운 쪽빛으로 친다. 쪽빛이 아름답게 물든 옷감을 얻는 일은 긴 시간 동안 인내하여 얻어낸 달콤한 결과물이다.

1. 석회만들기

1. 석회만들기

2. 널베기 위에 삼발이나 나무막대를 얹고 시루를 얹어 재넣기

2. 널베기 위에 삼발이나 나무막대를 얹고 시루를 얹어 재넣기

3. 쪽물조합

3. 쪽물조합

4. 고무래질

4. 고무래질

5. 쪽물들이기

5. 쪽물들이기

6. 처음에는 초록색이었다가 산화되어 푸른빛으로 물들여짐

6. 처음에는 초록색이었다가 산화되어 푸른빛으로 물들여짐

약력

  • 1921년출생
  • 1994년제24회 전승공예대전 입상
  • 1995년한국산업인력공단 고유 기능 전승자 선정
  • 2001년국가무형문화재 염색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02년천연 염색 축제 <천연염색 패션쇼-빛깔>전 출품
  • 2002년남도 천연염색<고운 빛깔>전
  • 2010년노환으로 별세
  • 글 이치헌 / 한국문화재재단

  • 보유자사진 최원진(사진작가, 혜천대 교수)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모시 쪽염색_30x1200cm.jpg

모시 쪽염색_30x1200cm

모시와 무명 쪽염색(모시_32cm,무명_34cm).jpg

모시와 무명 쪽염색(모시_32cm,무명_34cm)

모시쪽염색.jpg

모시쪽염색

삼베쪽염색_폭35cm.jpg

삼베쪽염색_폭35cm

쪽염색 1필_35cm.jpg

쪽염색 1필_35cm